어느 해 여름밤

▲ 서원대학교 김규철 교수

암기의 시대는 가고 창의성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아니 창의성의 시대가 이미 무르익었다. 모두들 창의적이기 위해 상자 밖으로 나가라고 한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열린 생각을 하라고 한다. 반복된 암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면 창의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대학시절,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노래를 잘했다. 기타도 잘 쳤다. 가끔 우리는 그의 기타반주와 함께 강의실에서 노래 부르며 놀다가 교수님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꽤 자주 그랬다. 어느 해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같은 노래를 반복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잘 안 되는 부분은 수정해가면서 반복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대충 20곡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그 곡들을 매일매일 반복해서 불렀다. 수없이 반복한 끝에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엔 악보를 보지 않고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나름 완벽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남해 상주해수욕장에 엠티를 갔다. 낮에는 해수욕도 하고 게임도 하며 즐겁게 놀았다. 그는 저녁을 먹고 나서 어두컴컴한 해변 가의 바위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둑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그의 노랫소리는 꽤 듣기 좋았다. 노랫소리에 이끌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잔잔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는 피서객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30분쯤 노래를 하고 그만두려고 하면 앵콜 요청이 들어왔다. 한 두곡의 앵콜 곡을 더 부르고 그는 리사이틀은 마치곤 했다. 그의 리사이틀은 3일 동안 반복됐다. 그는 그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그 3일 동안을 인생추억으로 만들었다.

한 가지 노래를 수백 번 반복하면 누구보다 그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 반복은 그 노래의 디테일한 감정, 선율 등을 예민하게 표현할 수 있게 만든다. 때로는 끌고, 때로는 끊고. 얼마든지 그 노래를 갖고 놀 수 있게 한다.

춤은 더욱 그렇다. 춤을 잘 추기 위해서는 같은 동작을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야 한다. 많이 반복한 사람일수록 춤을 잘 춘다. 많이 반복한 사람일수록 춤의 느낌을 본인의 감정 선과 잘 맞춘다. 관객들과 공감한다. 많이 반복할수록 춤을 재즈처럼 추게 된다. 늘렸다가 당겼다가. 즉흥적으로 무대의 분위기에 따라, 관객의 호응에 따라 창의적인 변형과 표현이 가능하다.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 같은 재즈도 수많은 반복된 훈련이후 원곡을 마스트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재즈의 즉흥곡은 반복이 만드는 창의적인 결과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에 대한 오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창의성은 커브나 변화구 즉 알쏭달쏭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틀렸다. 어떠한 경우에도 창의성은 직구다. 표현을 돌려 치든, 변화구든, 무엇이든 그것은 직구로 가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뿐이다. 창의성이란 돌아가지 않고 목적지에 직접 도달하는 것이다. 수신자의 마음으로 직접 가는 직구여야 한다. 우리가 수사법을 쓰는 이유는 수신자에게 즉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문장의 맛을 살려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반복이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어 있다. ‘넛지’라는 책에서 우리의 복잡한 뇌기능의 해석방식은 직관적이며 자동적인 사고방식의 자동시스템(Automatic System)과 합리적이고 심원한 사고방식의 숙고시스템(Reflective System) 두 방식이 있다. 자동시스템은 신속하고 직관적이며, 숙고시스템은 느리고 의식적이다. 사람들은 모국어를 말할 때에는 자동시스템을 사용하지만 다른 언어를 말할 때에는 숙고시스템을 사용하며 고군분투하는 경향이 있다. 뛰어난 체스 선수들과 프로운동선수들은 자동시스템을 사용하여 복잡한 상황을 놀랍도록 정확하고 빠르게 반응한다. 자동시스템은 골프나 테니스를 칠 때에도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필요한 동작이 튀어나오게 한다. 프로선수들이 숙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동시스템에 의존할 수 있게 된 것은 반복된 연습을 거쳤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해야 할 것을 다해 제대로 알고 나면, 열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부터 둘러보라. 그리고 움직여라. 반복해라.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성공도. 실패도. 아이디어도. 창의성도. 이것이 진실이다. 창의적으로 일하고 싶다면 반복해서 제대로 업무를 파악해라.

2020.09.15.

서원대학교 김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