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가 익는 철

                                                                                       시인 신 준 수

▲ 신 준 수 시인

살구가 익는 철, 햇빛이 공처럼 통통통 튀어다닙니다. 바람은 관람자처럼 멍하니 우두커니 열병식을 하듯 서 있습니다.

“살구” 가만히 입술을 달싹여봅니다. 어린 시절 뒤뜰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습니다. 봄이면 꽃잎이 환하게 집안을 비추었고, 꽃그늘 아래서 육남매는 살구처럼 푸르게 푸르게 영글어 갔습니다. 검은등뻐꾸기 볼륨을 높이면 푸르딩딩하던 살구도 약이올랐습니다.

입안에 넣자마자 퇘퇘 뱉어버리거나 눈과 입을 찡긋 거리기도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구가 하루에 그만큼씩 익어가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감했습니다.

할머니는 살구나무 아래 멍석을 깔아 살구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했고, 우리는 터지고 으깨진 살구나 주워 먹으며 살구씨나 주웠습니다. 함지박에 살구를 수북히 이고 읍내로 나간 할머니는 저녁이 되면 공책, 연필, 필통 라면 더러는 예쁜 꽃신으로 함지박을 채워 돌아오셨습니다. 그런 날 저녁은 함지박만한 웃음소리가 담을 넘나들었습니다.

더러 심심한 날은 살구씨를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며 돌멩이에 대고 살구씨 통통한 볼을 갈아 호루라기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었습니다. 고라데이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살구씨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휘리릭휘리릭 거리며 고샅을 몰려다녔습니다.

여름 방학에는 살구씨 줍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할머니는 저녁상을 일찍 물린 날에는 살구씨 겉껍질을 망치로 두드려 속씨를 모아 건재상에 내다 팔았습니다.

살구씨는 만병통치약이라 했습니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살구 다섯 개를 따서 먹은 뒤 씨를 동쪽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담가두었다가 이른 새벽 이를 잘 씹어 먹으면 오장의 잡귀를 쫒아내고 몸에 풍을 몰아낸다고 했습니다. 살구나무를 집안에 두면 전염병이 못 들어 온다고도 했습니다. 고라데이 어른들은 살구나무를 귀한 나무라 귀히 여겼습니다.

지금도 출렁거리는 그때기억, 와글대는 햇살아래 봄과 봄의 사이가 눈과 눈꺼풀이 촘촘 꽃잎일 때 야가야가 오금박는 소리가 허공을 찢었습니다. 살구나무아래 애벌레처럼 곰실거리던 동생은 뒤집힌 거북이처럼 버둥거렸고 입에서는 흰 거품이 살구꽃처럼 부글부글 부풀어 있었습니다. 빈 병에는 약냄새 독한 바람이 팔할쯤 들어 있었습니다. 겨우 세 살이던, 비눗물 한바가지쯤 마시고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으나 동생은 비틀비틀 여름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이깟 오살 노무 낭구” 가슴에 구근을 매단 엄마는 삭도보다 더한 말들을 쏟아내며 낫이면 낫, 도끼면 도끼로 살구나무 그늘이 환해지도록 나무를 찍어 댔습니다. 팔을 치켜들고 바르르 몸 떨던 오래된 살구나무 빽빽한 울음에서 엄마 냄새가 났습니다. 그 후 어떤 봄에도 살구꽃 달캉이는 소리 비추지 않았고, 우리 가족은 살구나무집을 떠났습니다.

툭, 마음 꺾인 엄마는 삼십여 년 피던 꽃이 더는 비치지 않는다 했습니다. 달았던 입엔 까칠한 바람만 들락거리고, 과녁을 향해 피고 지던 팽팽한 것들 몸 속 오르내리다 툭, 터지던 꽃들 풋것이 풋 것을 토해내던 살구나무 흰 그늘이 그리운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