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자 중심의 서비스를 한다는 것

▲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김현진 교수

이력서는 취업 때만 쓰이는 건 아니어서 나는 이력서를 매년 갱신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력서를 수정하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한마디. “주민번호는 왜 쓰냐?” “어차피 알려줄 건데 뭐” “그래도 생년월일 정도만 쓰지, 스스로 정보를 흘리는구먼”. 나의 이력서는 기타소득세 등 원천징수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업무를 보는 상대방이 두 번 세 번 일하지 않도록 미리 주민번호 등 각종 정보를 친절히 제공한다. 이건 과잉인가?

개인정보보호.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무심코 하는 동의 서명은 어떤 의미들을 담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나만 해도 수많은 서류에 서명하지만, 그 내용을 세세히 읽어보지 않는다. 그냥 대충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제공하는 정보가 무엇이며 내 정보는 어디에 쓰이는지, 얼마나 보존되는지 적혀있을 텐데 깜깜이다.

얼마 전 한 시설을 방문해 서류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서류를 살펴볼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대체로 우리 일이 노인이나 장애인 등 인지적 장애를 가진 대상자를 만나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할 권리를 가진다는 뜻이다. 역시 그곳에도 개인정보 제공 동의서가 있었다. 그런데 서명이 되어 있지 않았다. 서명 누락을 지적했더니 담당자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흘려 대답한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이 서류를 어르신들이 읽으셨을까요?” “글쎄요. 제가 대충 설명은 해드리는데 꼼꼼히 읽으시는 분은 별로 없어요” 라는 대답. “아, 어르신들이 이 글씨가 보이실까요?” 글씨는 10포인트 보다도 작게 보였다. 법과 제도가 정한 개인정보 보호의 내용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놓은 그 서류를 어르신들이 보셨을리 만무하다. 보험회사 약관 같은 그 서류 나도 안보이던데.

실무자가 언짢을지 모르겠으나 한 마디 조언. “어르신들이 보시는 서류는 글씨 좀 키워서 하시면 안될까요? 15포인트 정도로 해서 두세 장으로 만든다고 크게 자원낭비 같지는 않은데. 굳이 이렇게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어르신들 서류를 만드시는 이유가 뭘까요?” 무슨 이유가 있겠나. 그냥 그렇게 해왔으니까 했겠지. 그래서 바뀌었을까. 대답은 글쎄. 어르신들이 보시는 서류는 어르신이 보기 편하게 큰 글씨로 친절히 하는 게 진짜 프로정신이 아닐는지. 의무를 이행하다 정작 중요한 대상자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요자 중심, 이용자 중심, 대상자 중심은 아직 먼 이야기인가.

또 다른 아동시설에서 본 문서는 ‘보육원 출신 확인서’. 문서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지만 ‘보육원’이란 말이 왜 이리 걸리던지. 그 말에 더 보태는 시설 국장님. “아직 ‘고아 증명서’ 보내라는 데도 있어요. 교수님. 이건 약과에요” 보육원도 고아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른 말로 순화할 수는 없었을까. 그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당사자에게 사회가 다시 한번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닌지.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개인정보보호, 상대방 배려 없이 쓰는 수많은 행정 용어. 모두 공급자 중심 서비스의 대표적 사례. 상대의 입장을 먼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나부터 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