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 이순희 청주시사회복지연구소 소장

장미의 계절 5월은 가정의 달, 사랑과 감사의 달이다. 또한 가슴이 시리고 저린 달이다. 매년 오늘 5월17일은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전야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가슴에 묻을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생명들. 평생 잊지 못하고 한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괜시리 맘 아프고 심란하여 미뤄 두었던 집안 청소를 하였다. 구석구석 쌓여있던 먼지도 털어내고 책장도 정리할 겸 책들을 살피면서 버릴 건 버리고 보관할 건 가지런히 책장에 꽂아 놓는다. 작은 사이즈의 책들은 옆으로 누이고 여러 그림책들은 한곳에 모아 정리했다. 선물 받은 정성 가득한 예쁜 엽서와 말씀카드 등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간 무관심하여 보이지 않던 예쁜 컵초도 보이고 작은 종지도 새삼스레 보인다. 오늘 따라 작은 종지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언젠가 지인들과 전주에 갔을 때 공방에 들러 기념으로 평소 좋아하는 도자기 그릇 몇 개를 구입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한 파랑의 제법 운치 있는 도자기 종지다. 그땐 이 종지에 향을 피우면 안성맞춤이겠다 싶어 이걸 집어 들었건만 향을 피운 기억이 별로 없다. 그냥 고이 모셔둔 채 오늘을 맞이한 듯하다. 거의 관심을 못 준 그릇인 셈이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그릇에 꽃을 담으면 꽃병이 되고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 된다. 그릇에 오물을 담으면 쓰레기통이 된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좋은 향기를 피울 수도 있고 악취를 풍길 수도 있다. 사람도 마음 속에 담겨 있는 것들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

그릇이 큰 사람들은 사랑, 겸손, 감사 등 좋은 것들을 담아두고 그 좋은 것들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사람과 세상에 이로움을 준다. 선한 영향력으로 타인을 감화시키고 행동을 변화 시킨다. 그릇이 크다는 것이 꼭 학벌이 좋거나,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을 말하지는 않는다. 종교계, 학계, 경제계, 정치계 등 사회지도층으로 알려졌다고 모두 다 그릇이 큰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사람 나름이다. 매사에 불신, 불만, 질투, 모함, 시기, 갈등, 부패 등을 가득 담아두면 자신 스스로 오물통에 갇히게 된다. 그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필자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전 정권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뒤집는 것이다. 각 부처의 장관이 바뀌면 좋은 정책은 더 좋게 지속해 나가고 좋지 못한 정책은 과감하게 조정하고 정리해 나가면 될 일이다. 무조건 폐기하고 뒤집는 것이 능사인 것처럼 하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는 비단 정치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폐해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애써 이뤄놓은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고, 흔적 지우기로 일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황당함을 넘어섰을 때 우리 사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노고를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은 이어가고 부족한 것은 채워간다면 오히려 각자의 모습으로 서로를 빛나게 할 것이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 했던가. 심리학에서는 이걸 투사라고 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 세계로 옮겨놓는 정신 과정. 즉 방어적 과정이다. 이제 “ 당신 덕분이다”로 바꿔보자. 한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 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책임이다. 그릇이 좁고 얕은 사람은 딱 그만큼만 담고 쏟아 내지만 그릇이 넓고 깊고 맑은 사람은 공간이 넓고 넓어 상황과 사람 모두를 자신의 품만큼 채우고 안는다.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예쁜 마음의 그릇이 들어있다. 생각하는 대로 담겨져 크기도 모양도 각기 다른 마음의 그릇.

유경환님의 시 “호수” 중 일부로 마무리 한다.

“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