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天(귀천)

▲ 사회적협동조합 휴먼케어 이사장 송유정

봄철 환절기라 사망사고가 흔하다. 특히나 어르신들은 사소한 감기가 폐렴으로 이어져 며칠만에도 황망하게 돌아가시는 일을 흔하게 보게 된다. 업의 특성이기도 하겠으나 올해도 어김없이 어르신들과 작별하는 시간들이 많았다. 물론 나에게도 죽음은 하루하루 가까워오고 있다. 말로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호언했지만, 내일 죽는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말없기는 매한가지리라 생각한다. 죽음에 대하여 관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당사자로서의 나는 변할 수 없다하더라도, “죽음”을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공통이지 않을까? 그로부터 시작한다면 어쩌면 내 안의 작은 호연지기를 기르는 씨앗이 움터날 것이란 기대를 품는다.

작은 요양원을 운영하는 법인의 대표인 나는, 지난해 지인으로부터 운보 김기창의 화첩을 선물 받았다. ‘예수의 생애’라는 작품의 스케치 화첩이니 채색이 여건 까다로울 것이되, 이것을 어디에 쓸 것인고 잠시 고민하다, 당시 요양원 입소자 중 가장 우울감이 크신, 세상 모든 것이 권태롭고 귀찮으신, 당장 내일 죽어도 본인은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는 듯 보이는 아버님이 생각났다. 무료함을 넘어 잔뜩 삐딱하신 아버님은 그 어떤 프로그램도 불참을 선언한 터였다. 그남둥 당신 아드님과 지인인 나에게만큼은 비교적 관대하시다는 것이 다행이랄 밖에...

“아버님! 운보 김기창 화백아세요? 그분이 그린 작품이라는데, 이거 하나밖에 없는 거라 가져왔는데, 혹시 아버님 색칠이 가능하실까요?” 요양원에서 흔한 색칠 프로그램에서 색연필 한번 쥐어보지 않으셨던 아버님이 침상에서 반짝, 바라봐주신다. 쇠소리를 내시는 입을 떼어 예상 외 “색연필 가져와 봐~” 하신다. 옆에서 몇마디를 거들며, 힘없는 손에 어렵사리 색연필을 쥐어드리고는, 색이 칠해지는 과정은 보지도 못하고 연신 신기하다고 소란만 떨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다시 가 인사드리며 문안을 여쭈었더니, 우아!~ 놀라운 색감으로 그림 서너장을 완성해 놓으셨다. 문외한인 나라도 이 색칠은 예사롭지가 않다. 반가운 마음에 아드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대화 끝에 지인께서는 아버님이 왕년에 동아극장 간판쟁이셨다고....

그 이후로 우리는 아버님의 맑은 눈동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버님을 모티브로 요양원에 치유정원을 꾸미고, 지난 가을 끄트머리에 아버님 작품 전시회를 기획했다. 기왕 아버님의 생애를 같이 전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끝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떠나오셨다는 아버님의 빈집에도 들러, 뽀얀 먼지속에서 당신의 40년 전 추억도 건져 올렸다. 당신 빛나던 시절의 역사들이 오롯이 드러나, 우리는 정말 멋진 생애사와 함께 어르신의 작품전시회를 열었다. 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반갑게 찾아주셨고, 지역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어 ‘웰다잉’을 주제로 뉴스 한꼭지가 방영되었다. 그날 아버님이 손님들 앞에서, 마이크에 잔뜩 쉰 목소리로 인사를 전하시던 모습은 나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연세도 연세이시지만 당뇨합병증으로 건강은 더욱 쇠약해지셨고, 올초에는 위급해지셔서 급기야 병원행을 결정하셨고, 종래에 투석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악화되었다. 가족은 고민했다. 과연 어떠한 죽음이 옳고 그르고가 있을까마는 연명치료는 아버님께도 가족들에게도 결코 옳은 판단이 아닐거라는 결정을 다섯 형제가 모여 하기까지는 고민도, 애닳음도 컷으리라. 혜량하고도 남음이다. 장례식장에서는 아드님의 제안으로 다시 아버님의 작품 전시회가 펼쳐졌고, 장례미사는 모두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평생을 괴팍했지만, 따듯한 봉사자로 삶을 마치신 아버님의 삶의 궤적을 지켜보며 나는 이 대목에서 ‘죽음의 방식에 대한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신이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은 자가당착이다. 하지만, 적어도 연명치료를 앞두고 사전에 자신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사회 풍토, 그리고, 평생을 갈무리할 수 있는 외부적 장치가 가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마련될 수 있다면, 남은 자의 몫이겠으나,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이번 아버님의 장례를 지켜보며 내내 생각이 머문다. 93세 일기에 비해 이 길지 않은 1년여의 시간들은 보호자들에게도 요양원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과단은 금물이나 고인이 되신 아버님께도 아마 기쁘지 않으셨을까 감히 생각하는 점은 이 죽음이 적어도 우리 지역사회에서는 ‘사회적 반향’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일거다. 이렇게 작은 단면들이 쌓여 우리는 어느 순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종착역에 가장 빛나게 마련되어야 하는 하나의 축제로 받아드리면 어떨까?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시처럼 마침내 하늘로 돌아가 “나 소풍에서 돌아왔노라” 개구지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며 나는 오늘을 살아낼 지어다.

故 김종삼어르신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